Archive for the ‘시’ Category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2008 12 13

조그만 사랑 노래

황 동 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의 눈.

(1972)

[시][이면우] 뿔

2008 09 4

 이면우(1951~)

 

몇 몇 타고 더 많은 이들 남겨진 눈 속 버스 정류장

낡은 짐짝처럼 귀퉁이에 잊혀졌던 그 노파

하늘 땅 새 폭설 혼자 걸어나갔다

이 아침 무엇이 그녀를 눈발 헤치며 시내로 가게 하는지

남은 이들 서성대며 눈길 주다 눈보라에 녹아들고

먼저 떠난 버스, 고갯길에서 부르르릉 자꾸 미끄러진다

이윽고 그 노파 멈춰선 버스 앞질러 올라갈 때

굽은 등에 뿔 하나 솟아 끄덕끄덕댄다

초만원 버스에 갇힌 한 남자, 불쑥

장갑 낀 손 유리창에 문질러 선명해진 세상 속

그녀 등허리에 솟아 걸음 따라 흔들리는 그건

마른 미역 몇 오라기였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작과 비평, 서울, 2001

[시][이면우] 손공구

2008 09 4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시][박서원]꽃신발

2007 06 27

꽃신발
——
박서원

정령들은
몰래
꽃씨를 신발에 놓고 간다

그리움에 몸 저리는 병
이루면
괴로운 남녀 술취한 밤
되는 줄 알면서

새록 새록
헌 신발에도
새 신발에도

꽃씨를 뿌리고 간다

헌 신발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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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백석]백화(白樺)

2007 06 26

- 산중음 4

백 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시전집 ‘모닥불’(1998, 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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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상병]나의 가난은

2007 06 26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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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철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2007 06 26

장철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일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시][함민복] 만찬

2007 02 21

만찬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시][이시백] 동지

2007 02 16

이시백

바람이 전봇대처럼 많이 울던 밤

개가 집을 나갔다

나는 바람에 날려 갔을까 몰라

대추나무 위도 보고

지붕 위도 보았지만

개는 집을 나갔다

쓸쓸해서

밤에도 나가 찾아 보았지만

개는 없고

손톱달이 눈을 흘기며

푸른 우물 위로 지나갔다

[시][김남주]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2007 02 10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김 남 주

마을 앞에 개나리꽃 피고

됫동산에 뻐국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꽃 피고 새만 울면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없다면

시냇가에 아지랑이 피고

보리밭에 종달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산에 들에

쟁기질에 낫질 하는 총각이 없다면

노동이 있기에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산에 들에 쟁기질 하는 총각이 있기에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